영화 감상문

가버나움 감상문

koh1018 2021. 1. 2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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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 : 가버나움

영화 요약정보 : 장편 / 예술영화 / 드라마 / 126분 42초

개봉일(영화진흥위원회 기준) : 2019.01.24

감상경로 : 유튜브 영화

 

 제가 이 영화를 보기 전 가장 궁금했던 것은 영화 이름의 의미였습니다. 영화를 다 본 후 영화 제목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가버나움은 이스라엘 갈릴리 바다 북쪽에 있던 성읍으로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었습니다. 이곳은 예수가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지만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 퇴락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된 곳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 배경은 레바논입니다. 그래서 왜 다른 곳의 지명을 제목으로 지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화 속의 레바논은 내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러한 상황으로 봤을 때 제목을 상징적으로 가버나움으로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가버나움은 프랑스어로 '잡동사니를 두는 곳'이라는 의미로 프랑스 문학에서는 카오스, 혼돈을 표현할 때 가버나움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제목은 주인공이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암시하는 제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감상문을 작성할 영화를 찾던 중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최장 15분간의 기록적인 기립박수가 터진 영화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어떠한 점 때문에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이토록 긴 기록적인 기립 박수를 받았는지 궁금했습니다. 때문에 이 영화를 고르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사건이 재배치 된 플롯 구조로 진행됩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시간적으로 나중의 사건인 법정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법정에는 한 소년과 부모가 서 있습니다. 이들이 재판장에 서 있는 이유는 한 소년이 '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모를 고소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소년이 교도소에 있다가 재판을 위해 법정에 나왔다는 정보를 주는데, 이후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보여줍니다.

자인은 무척 가난한 가정의 첫째입니다. 자인은 동생이 무척 많은데 세기도 어 려울 정도 입니다. 안 그래도 가난한 가정에 아이도 많아 부모는 항상 집세에 허덕이며 애들이 배고파하면 설탕물을 먹여서 달랩니다. 자인은 이러한 환경 때문에 학교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부모에 의해 일종의 '앵벌이'를 강요당합니다. 약국에 가서 가짜 처방전으로 약을 사 그 약으로 주스를 만들어 거리에서 팔기도 하고 마트에서 배달을 하기도 합니다. 자인이 하는 일중 가장 주된 일은 아사드라는 사람의 식료품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인 은 어린 소년이지만 어린 소년에게는 버거워 보이는 가스통과 같은 무겁고 큰 물건들을 군말 없이 배달하며 돈을 벌기위해 일합니다. 자인이 일하는 식료품 가게의 주인의 이름은 아사드로 30대 백인입니다. 아사드는 자인이 살고 있는 건물의 건물주이기 때문에 자인의 부모는 아사드에게 꼼짝 못합니다. 아사드는 자인이 일을 마치고 집에 갈 때 자인에게 군것질 거리를 주며 자인의 여동생 사하르에게 가져다주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인은 아사드가 준 보따리를 사하르 에게 전해주지 않고 가는 길에 있던 쓰레기 더미에 냅다 던져버립니다. 자인은 사하르에게 군것질 거리를 주는 아사드의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사 드는 자인의 여동생 사하르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합니다. 일반적인 사회통 념으로 보면 사하르는 결혼하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입니다. 그러나 아사드와 자인의 부모는 이것이 원래부터 있던 문화고 전통이라며 이를 정당화 합니다. 자인은 사하르를 매우 아꼈기 때문에 자신의 여동생을 호시탐탐 노리는 아사 드를 더욱더 미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하르는 초경을 시작합니다. 그것 을 알아챈 자인은 자신의 옷을 주며 속옷 밑에 넣으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부 모가 알면 사하르를 아사드에게 시집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인 은 이 사실을 숨기고 사하르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합니다. 갈 차편도 알아보고 그동안 모아둔 돈도 챙기고 사하르를 데리러 왔지만 자인이 집에 왔을 때는 이미 아사드가 집에 찾아왔을 때였습니다. 화장을 하고 아사드 옆에 앉아있는 사하르를 보고 흥분한 자인을 자인의 어머니는 막으며 그냥 장난으로 화장한 것이라며 자인을 막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과는 다르게 이는 자인의 예상 대로 결혼의 과정이었고 사하르는 아사드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사하르는 울며 시집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사하르를 강제로 오토바이에 태 워 보내버립니다. 결국 사하르는 아사드에게 팔려갑니다.

부모와 아사드에게 화가 난 자인은 사하르와 함께 도망치려고 준비한 것들을 챙겨 집을 나갑니다. 자인은 정처 없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갑니다.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자인의 옆자리에 나이가 지긋한 스파이더맨 복장을 입으신 할아 버지가 탑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스파이더맨이 아닌 '바퀴벌레맨' 이라고 소 개합니다. 할아버지에게 호기심을 느낀 자인은 할아버지를 따라 뒤늦게 어떤 놀이동산에 내립니다. '바퀴벌레맨'을 찾던 자인은 놀이동산의 이곳저곳을 헤매 는데 '바퀴벌레맨' 할아버지는 찾지 못합니다. 놀이공원의 레스토랑에 앉아있던 자인은 레스토랑에서 청소하던 라힐이라는 흑인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라힐은 케냐에서 온 사람으로 원래 한 저택에서 가사 도우미를 하던 여성입니다. 하지 만 가사도우미 일을 하던 곳에서 누군가와 사랑을 하게 되고 임신을 하게 되 는데 그 사실을 들키게 되면 쫓겨날까봐 스스로 그 집을 나왔습니다. 그 집에 서 나왔기 때문에 라힐은 불법체류자 신분입니다. 때문에 라힐은 돈을 주고 산 가짜 신분증으로 이곳저곳에서 작은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라힐은 자신의 아 이 때문에 악착같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아이를 두고 일을 나가야하는데 아이가 너무 어렸습니다. 어린 아 이를 집에 혼자 두고 일을 다닐 수 없던 라힐은 자신의 아이 요나스를 놀이동 산 화장실에 놔두고 화장실이 고장 난 것처럼 하며 틈틈이 가 젖도 먹이고 재 웁니다. 어느덧 밤이 되었고 가출한 자인은 잘 곳이 필요했고 배가 고팠습니 다. 자인은 낮에 대화를 하며 조금 친해진 라힐을 따라가며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심성이 착한 라힐은 자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먹을 것을 챙겨주고 재워줍니다. 그날 이후, 자신이 일할동안 어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던 라힐은 먹고 잠잘 곳이 필요한 자인을 거둬줍니다. 이런 이해관계가 잘 맞았던 라힐과 자인은 서로 도우며 생활해 나갑니다. 라힐이 살고 있던 집은 자인의 집보다도 더 낡았었습니다. 라힐은 요나스를 방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간이 풀 장에 두고 거기서 놀게 하고 자인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자인은 라힐이 일을 나간동안 요나스를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라힐은 자인에게 먹을 것을 챙겨줍니 다. 라힐은 처음엔 불안해했지만 요나스를 친동생처럼 잘 보살펴주는 자인에게 믿음을 가집니다. 이렇게 꾸역꾸역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라힐에게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라힐은 불법체류자 신분이기 때문에 이 사실이 들키면 언제든 지금 살고 있는 나라인 레바논에서 쫓겨날 수 있었 습니다. 때문에 라힐에게는 새로운 신분증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신분증을 마련해주는 아스프로라는 브로커가 있는데, 이 브로커는 라힐에게 1500달러를 마련해오면 완벽한 신분증을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라힐이 갖고 있는 돈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동안 틈틈이 모은 돈은 1000달러 정도 되었지만 아직도 500달러나 부족했습니다. 라힐은 돈을 마련하기위해 일하던 가게에 가 불을 해달라고도 부탁하고 여러 방법을 강구했지만 어디서도 돈을 구하지 못 합니다. 라힐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긴 머리카락도 팔지만 그 돈으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이 와중에 아스프로라는 브로커는 라힐의 아이, 요나스를 자신에게 넘기면 신분증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라힐이 이토 록 신분증을 구하려고 하는 이유는 아이와 단둘이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라 힐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렇게 라힐이 돈을 마련하던 어느 날, 라 힐이 집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인은 요나스를 돌보며 라힐을 계속 기다리지 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라힐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집에 먹을 것도 다 떨어 지자, 자인은 그 작은 체구로 어린 요나스를 데리고 라힐을 찾아 나섭니다. 물 어물어 라힐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라는 아스프로를 찾아내 그를 만나지만 그에게서도 라힐의 행방을 찾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아스프로는 혹시 라힐이 집에 돌아오지 않냐며 요나스를 자신에게 넘기면 너와 요나스를 모두 좋은곳 으로 보내주겠다고 꼬시지만 아스프로를 경계하던 자인은 라힐이 집에 있다고 거짓말하고 제안을 거절합니다. 라힐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자인은, 라힐이 없 는 동안 갖은 방법을 다해 요나스를 챙겨주지만 돈이 없습니다. 쫄쫄 굶던 자 인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큰 냄비 같은 것에 요나스를 태우고 끌고다 니며 집에 있던 식기들을 팔러다닙니다. 한편, 이렇게까지 자인과 요나스가 고 생하는동안 라힐이 나타나지 못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라힐이 불법 체류자로 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라힐은 불법체류자로 잡혔지만 경찰에게 아 들얘기를 꺼내놓지 못합니다. 혹시 잘못 말했다가 아들을 자신과 떼어놓을까봐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돌아오지 못하는 라힐때문에 고생하던 자 인은 결국 요나스를 버리고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요나스는 자인을 계속 쫓아 왔고 자인도 그런 요나스가 안쓰럽고 차마 버릴수가 없기에 다시 요나스를 데 리고 갑니다. 자인은 전에 집에서 주스를 만들어서 팔던것과 비슷하게 소금물 을 만들어 팔며 돈을 조금씩 벌어갑니다. 자인은 이렇게 돈을 벌러 다니던 중 어떤 아이에게 스웨덴으로 가면 모든게 자유롭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는 이야기를 듣고 아스프로를 찾아갑니다. 아스프로는 돈과 출생과 관련된 서 류를 가져오면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말합니다. 자인은 서류를 가져오기 위해 할 수 없이 가출했던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자인이 집에 돌아오자 자인의 부모는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손가는대로 자인을 때립니다. 자인은 그에 맞서 자신의 서류를 내놓으라고 화를 냅니다. 하지만 자인은 출생 신고가 되어있지 않았고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자인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말 하며 집세 밀렸다는 서류, 병원 갔다는 서류 등을 대신 보여주며 자인에게 화 풀이를 합니다. 자인은 아버지의 성난 말을 듣던 중 병원에 갔다는 서류를 보 고 이상한 느낌을 받습니다. 둘러보니 자인의 어머니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습 니다. 알고 보니 자인이 아끼던 여동생, 시집간 사하르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사하르는 11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임신을 했고 하혈이 너무 심해 병원에 갔지 만 사하르도 자인과 마찬가지로 출생신고가 되지않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에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사망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자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엌에서 칼을 빼들고 거리로 내달 립니다. 자인은 그 길로 아사드의 식료품점으로 뛰어갔고 아사드에게 칼을 꽂 습니다. 이것이 자인이 현재 교도소에 살인 미수형으로 수감되어 형을 지고 있 는 이유였습니다. 자인이 교도소에 수감되고, 얼마 후 자인의 어머니가 자인을 면회 옵니다. 자인의 어머니는 사하르의 일을 위로하며 자신이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자인의 어머니는 뱃속에 있는 이 아이가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며 만 약 여자아이면 '사하르'라고 이름짓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인은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메스꺼움을 느끼며 '엄마의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 른다'고 합니다. 자인은 자신과 자신의 동생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부모로 서 책임감은 커녕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것 같은 자신의 부모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방송사에 전화를 해 도움을 받아 부모를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로 고소합니다. 이렇게 영화 첫 부분에 나왔던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신경 쓰이는 시각적인 부분은 시작부터 끝 까지 일관된 카메라 앵글의 위치였습니다. 카메라는 영화가 시작하는 법정 장 면부터 어린 소년인 자인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자인은 12살 정도로 어린 꼬 마아이이기 때문에 카메라 앵글은 다른 영화에 비해 무척 낮은 높이에 있습니 다. 지나가는 어른들의 모습은 모두 허리만 보이는 위치입니다. 이러한 시각적 인 부분 덕분에 저는 더 영화 속 자인과 눈높이를 맞추며 자인의 상황에 몰입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시각적인 요소로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 폐건물에서 노는 아이들, 담배와 마약을 하는 아이들을 보여줍니다. 이런 소품들과 지저분한 거리, 다닥다닥 붙 어있는 판잣집 등의 미장센들은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의 혼란스러운 모습과 어 른에게 돌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몰입해 영화를 본 후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자인이 사진기 앞에 선 장면이었는데 사진 기사 는 영정 사진도 아니고 신분증을 만들기 위한 사진인데 좀 웃으라고 합니다. 자인은 이 말에 활짝 웃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첫 번째로 청각적인 부분에 대한 이유였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웃고 있는 자인 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어두운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이런 비동시 사운드 효과 를 통해 저는 자인의 현실이 나아지고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인에게는 씻 을 수 없는 상처가 속에 남아있다는 점이 느껴졌습니다. 또 자인은 언론의 관 심을 받아 도움을 받게 되었지만 기존의 자인의 삶과 같은 지옥 같은 삶을 대 물림 받고 있는 누군가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도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감상 때문에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은 것 같습니다. 제가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 억에 남은 두 번째 이유는 자인이 웃을 때 저는 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자 인이 한 번도 웃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자인은 항 상 걱정, 분노, 원망, 체념과 같은 감정이 뒤섞인 어두운 무표정을 하고 있었습 니다. 저는 영화가 끝난 뒤 무엇이 이 소년을 웃지 못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원인은 가난이었습니다. 끔찍한 가난은 자 인의 부모로부터 이어져 대물림 되었으며 이 힘든 환경은 심지어 자인의 부모 를 조금은 이해하게 만들 정도 입니다. 가난은 자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인 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많은 양의 노동을 하며 돈을 벌지만 자 인은 자신의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저는 그동안 누구나 본인의 삶 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며 그 기회가 공평하진 않지만 노력하 는 사람에게는 본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 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본 후 제가 만약 자인과 같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인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만약 자인과 같은 환경에 처해있었다면 같은 생각 을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저는 이를 통해 제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이 세상은 불공평하며 인생을 시작하면서부터 출발점이 다른 경우가 정말 많이 존재하고 그 출발점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가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영화는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 생각에 이어 그렇다면 이들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지를 생 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영화 속과 같이 살아가는 이들 이 모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미 이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각인되어 대물림 되고 있는 가난은 몇 세대 안에 변화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영원히 웃음을 잃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여러 생각 끝에 저는 이 소년을 웃지 못하게 만든 다른 근본적인 이 유를 생각했습니다. 바로 부모의 '책임감'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무조건적으 로 행복할 수 없다는 이유가 되진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소년이 영화 내 내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부모의 '책임감'의 부재 때문입니다. 자인의 부모는 가난한 이 현실 속에서도, 이미 책임지지 못할 수많은 아이들을 낳고서도 동생 을 또 가집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그들의 상황 속에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계속 낳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들은 통제하지 못할 이 상황에 대 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아이가 너무 많아 어린 아이를 돌보 지 못해 자신의 아기의 발에 쇠사슬을 달아 묶어 놓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 의 딸 사하르를 아사드에게 '팔려 보내'고 발생한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 른 후에도 그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 그저 그들의 무책임 했던 과거를 지우려고 합니다. 저는 이 때문에 자인의 부모의 상황에 대해 공 감은 하지만 그들은 '본인의 상황이 되지 않아보고서야 자신을 욕할 수 없다' 는 그들의 주장과 다르게 비판받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며 놀 라웠던 것은 이처럼 어른인 부모도 갖지 못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 있 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인공인 어린 소년 자인입니다. 자인은 부모에게 같은 피를 물려받았지만 그의 부모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인은 무척 어린 나이지만 부모보다 더 큰 책임감을 보여줍니다. 우선 자인은 맡은 일에 책임감 을 보여줍니다. 궂은일이지만 마다하지 않고 시키는 일을 가족의 생계를 위해 꾸역꾸역 해냅니다. 또 오빠로서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 하르가 초경을 할 때 동생을 지키기 위해 본인의 옷을 주었고, 동생이 '팔려 가는'것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이외에도 많은 장면에서 자인의 책임감이 드러났지만 자인의 책임감이 가장 드러난 부분은 라힐의 자식인 요 나스를 보살피는 장면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일을 나가는 라힐을 대신해 자인은 요나스를 보살핍니다. 자신의 친동생도 아니고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 니니 대충 보살피거나 소홀히 할 수 있음에도 자인은 요나스를 마치 자신의 친형제처럼 잘 돌봐줍니다. 라힐이 불법체류자임이 들통 나고 연행되어 감옥에 수감 되었을 때에도, 자인은 어린 요나스를 데리고 다닙니다. 본인도 무척 어 린나이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지만 자인은 오히려 냄비 등을 팔아 돈 을 벌어 요나스를 돌봐줍니다. 자인이 감옥을 나서며 부모를 고소할 때 한 말 이 있습니다. '자신도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입니다. 제 생각에 자 인이 되고 싶었던 '훌륭한 사람'은 본인의 부모와 달리 부모로서 자식에게 '책 임'을 다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저는 부모로서의 자식에 대한 책임은 커녕 본인이 처한 환경에 대해 자식에게 화풀이하고 윽박지르고, 욕하고, 손찌 검하는 부모 때문에 자인이 웃음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부 분 속에서 영화는 희망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서 새 로운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새 세대가 다음 세대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인 은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책임을 지었었고 상처를 받았지만 자인은 분명 자 신의 다음 세대, 자신의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는 부모가 될 것입니다. 자인의 새 가정은 가난할 순 있지만 자인의 자식은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 다. 가난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 영화가 세대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을 통해 '책임감'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짚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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